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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이름 클 홍(弘), 자루 표(杓) 홍표 입니다.

 저는 1977년 현재 마산시 합포구 진전면 이명리의 조그마한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클 홍(), 자루 표()라는 제 이름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종가집 장손으로서 정해진 이름이었습니다. “숲이 깊어야 범이 나오는 법”, “사자는 고양이와 다투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자주 사용 하시던 할아버지께서 큰일을 조정하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어머니가 시집오시던 해에 아들 이름이라고 지어 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귀한 아들이라 백일 사진도 찍고, 돌 사진도 찍었다 하시는데. 저희집 어디에서도 그 사진을 본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제가 가진 최고 어릴적 사진입니다. 제가 저희 어머니가 돌사진과 백일 사진을 찍었다하신 말씀을 못 믿는 이유중 하나이기도 한 사진입니다. 제게 늘 귀한 아들이라 새자전거 사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진전초등학교로 통폐합이 되었지만, 제가 다닌 초등학교는 창포만을 발 앞에 둔 이창초등학교였습니다. 1-6학년 전체 정원이 58명으로 제가 졸업할 때는 8명이 졸업한 단 촐 한 학교였습니다. 적은 규모의 학생으로 인하여 전인교육, 자연교육을 늘 누릴 수 있는 초등학교의 생활은 제 인생의 가장 큰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조개 잡고, 게 잡고, 칡케며, 소꼴(소 먹일 풀)을 베러 다니던 자연과의 추억은 아직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초등 중등 때는 곧잘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습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 유학까지 나왔으니 말입니다. 시골서 마산으로 나온 첫날 날 제 이삿짐에는 작은 손전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골 동네에서 저녁에 잠깐 나가려 하면 꼭 손전등이 필요했었는데, 마산의 밤은 촌놈에게 휘양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나온 도시의 삶은 저에게 한동안 익숙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곧 친구들과 즐겁게 고등학교 생활을 하였습니다.

 

<학생수보다 선생님 수가 많았던 초등학교 졸업식 앨범, 앨범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창한>


<연합고사를 합격한 후 친구들과 함께>


19963월 대학의 신입생의 봄날은 그 당시 시트콤의 대학생활과는 판이 하게 달랐습니다. 무언가 스스로 찾지 못하면 누릴 수 없는 낯선 대학 생활이었기에 대학생의 여가와 제2의 전공의 장인 동아리에 가입했습니다. “영화패 광야에서라는 동아리 이었습니다. 그 당시 동아리에서 가장 이쁜 여자 후배를 만나 현재 부부의 연을 맺어 딸(7), 아들(10)을 둔 부모가 되어있습니다.




<경남대학교에서 제일 이쁜 제 아내와 함께>


저의 대학생활은 모토는 많은 사람을 알자.” 였습니다. 대학의 1,2학년은 보모님들이 야 이녀석아~! 대통령얼굴은 9시 뉴스에서라도 볼 수 있지만, 넌 얼마나 바쁘게 돌아 댕기기에 대통령 얼굴 보기보다 힘드냐라는 말을 듣고 다닐 정도로 바쁘게 활동 하였습니다. 그 때만난 선후배들은 저의 큰 자산이기도 합니다. 대학 3학년때에는 인생의 전환기 였습니다. 갑작스레 IMF 여파로 한여름 45도가 웃도는 유리 온실 건설 현장에서 1년의 막노동을 하여야 했고, 남들 다 받는 장학금을 몹시 부러웠던 저는 성적 우수 장학금이 아니라 학교에서 야간 경비 아르바이트로 [근로장학금]형식으로 받았습니다.




<현재 매립되고 사라진 가포갯벌 조사>



<통일을 꿈꾸던 청년 홍표~! 저 넘어 북한을 바라보며, 임진각에서>


<경남 인근 대학 연합 활동>

2002년에는 미국 플로리다대학의 연구소에서 잠깐 폐수처리분야의 실무 연수를 수행 하였습니다. 그 당시 헬로우라는 간단한 인사말 조차 나누지 못한 제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학연수를 결심하였습니다. 어학연수에를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연수경비 마련을 위해 혹독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3시경에 일어나 마산 어시장에 물건을 팔러 나가시는 동네 어르신들을 5,000원 차비를 받고 모셔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제 차가 봉고 프론티어 1톤 트럭 이었습니다. 보통 5명에서 6명 모셨습니다. 매일 3만원 내외의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돈을 차곡히 적금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돈이 500만원쯤 되었을 때 부모님께 말씀 드리고 어학연수를 떠났습니다




2004년 어학연수를 끝내고 저는 경남대학교 환경문제 연구소와 연안역 폐자원 환경연구센터의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당시 미국의 해양환경대기청(NOAA)와 마산만 GPA(Global Plan Action) 사업을 수행 하였으며, 2006년부터 매 3년 마다 개최되는 EAS(East Asia Sea) Congress에 참가하여 마산만과 경남의 연안관리 현황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만들었던 Masan Bay라는 영문 소개 책자는 내가 나고 자란 지역을 국제적으로 소개 할 수 있는 책자를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후 마산만 연안오염 총량관리제 시행을 위한 기본 조사 사업부터 지역 환경 현황을 연구 분석하는 일을 수행 하여 왔습니다. 저의 이런 활동은 해양수산부관할 마산만특별관리해역 민관산학협의회 사무국장으로 이어져 2013까지 마산만의 보전과 회복 그리고 지속가능을 위해 함께 의논하며 정책과 사업을 수행 하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NGO와 행정기관의 중간에서 서로의 의견 조율을 담당하면서 거버넌스 체계를 습득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클 홍(), 자루 표()라는 제 이름 홍표처럼 일을 잘 조정하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