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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도 논에는 나오지 마라 하시지만

아버지
가난이 넉넉한 재산이었던 시절!
그 재산만큼 아들 딸에게 물려주시기 싫어
아버지 뼈가 이룬 몸 하나로 버티며
모진 삶!을 일구시더니
이제 삼시 세 때 밥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그 무렵!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급히 가셨습니까?

이제 그 아들
당신곁에 서니
당신의 삶 끄트머리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게됩니다.

아버지!
올 추석도
아버지 덕에 모두들 웃으며
마무리 짓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

빈 논

- 안도현 -

아버지 
아버지의 논이 비었습니다
저는 추운 서생(書生)이 되어 돌아와 요렇게 엎드려
빈 논, 두려워 나가보지도 못하고
껴안지는 더욱 못하고 쓸쓸한
한 편 시를 써보려고 합니다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참나무 가시나무 마른 억새풀
아궁이 가득 지펴 펄펄 끓는 쇠죽솥
쇠죽솥 같은 앞가슴
아직도 만들지 못하여서요,
저 죽은 논에 까무잡잡 살 없는 논에
물줄기도 비켜 가지 앉게 불러들이고
그 흙물에 서늘히 발목을 적시고
눈 닿는 곳이 다 내 하늘이라
아버지 뼈가 이룬 몸 하나로 버티며 서 계셔도
아, 바로 아버지가 하늘이었지요
그때야말로 가난이 넉넉한 재산이었지요
오늘밤 아버지의 논에 누운 살얼음을 밟고
달이 둥실 뜨는 것을 아시는지요
달빛을 따라
이 궁핍한 밤에도 삽을 들고
성큼 성큼 논으로 나가시는 아버지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바지 활활 걷어붙이고
역사의 논물에 발을 담그는 것도
거머리가 붙으면 이놈의 거머리 하며
철썩 젖은 종아리 아무 일 아닌 듯 때리는 것도
저는 겁나는 일이기만 한데
세상의 어둠 다 몰려와 난리를 치는
빈 논에 아버지 돌아오셨군요
아버지의 논바닥 저 깊은 곳에서
겨울에도 푸른 모들은 힘차게 꼼틀거린다고
제가 쓰는 시 이 부족한 은유로는
당신의 삶 끄트머리도 감당할 수 없음을 압니다
아버지
꿈에도 논에는 나오지 마라 하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