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부는 바람을 탓을 하지 않고 자주 뵈러 가겠습니다. 할머니..사랑합니다.

동동구리무 한번 찍어 바르지 않으셔도 고우셨던
우리 할머니 황제연 여사의 소싯적 사진입니다.

훤칠한 키에
앙다문 입술
오똑한 콧날
큼지막한 귀
온 동네가 밝아지실 만큼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할머니의 생은 1922년, 겨울이 절정에 달하던 정월달에 시작되었다.

일 년 중 첫째 달, 그것도 보름날, 맏이의 고단한 삶을 예견이라도 하듯, 그녀의 생이 혹독한 겨울임을 선전포고라도 하듯 해오름 달에 삶의 서막을 올렸다.
고성 동해면의 내산마을, 그 날은 겨울이 나지막이 내려앉은 고요한 날이었다.

할머니가 살았던 시대는 여성에게는 가혹하리만치 굴레가 많았다.
여자가 아는 게 많으면 건방지고 못된 본을 본다고 글을 배우지 못하고 복종하듯 일만 하면 되는 삶이었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탐하거나 원하는 것을 말하거나 하는 것은 일종의 나쁜 본이었다.

키도 훤칠하니 크고 인물도 좋고 해서 정신대 끌려갈까봐 빨리 시집보내려고. 멀리 보내려고 하셨다.

당시 꽃다운 나이였던 할머니는 행여나 위안부로 끌려갈까, 하는 초조함에 피신시키듯 결혼시켰다.
그 후 독사지옥같은 모진 삶이였다.
아무것도 없는 종가집 큰며느리!
줄줄이 딸린 시동생과 어린 시누이들!
할아버지는 결혼 후 돈벌어 오겠다고 일본으로 들어가셨다.
해방후 돌아온 할아버지 곁엔 벌었던 한 푼의 돈도 없었다.

그렇게 모진 인생을 헤쳐나갔으나 가슴에 커다란 못이 세개나 박혔다.

아무리 빼내려고 해도 빼낼 수 없는, 아니 빼내고 싶지 않은 못이다. 상처가 덧날까 겁이 나는 그런 못이다.

부산까지 뱃길을 오가며 물건을 팔러 다닐 때 늘 업고 다녔던 둘째 아들과 모든 열과 성을 다해 대학까지 공부 시킨 집안의 대들보 셋째 아들, 그리고 하늘 같이 할머니의 온 삶이셨던 첫째 아들도 앞서 갔다.
빼내려고 해도 빼낼 수 없는 못이 3개나 박혔다.

그후 할머니는 잊음이 잦아 지셨다.

<할머니는 살기 위해 기억을 지운듯 했다. 그래서 웃으시는 날도 많다>

 할머니는 살기 위해 기억을 지운듯 했다. 아무리 강한 할머니도 감당하기 힘든 상처, 받아들일 수 없는 아픔이 있는 것이다. 한 명도 아니고 4남2녀의 자식중 3명의 아들을 먼저 보낸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독한 할머니도 어려운 일이었다. 찢어진 심장을 덮어만 놓고 차마 들쳐보지 못했다. 대쪽 같고 흐트러짐 없고 기억도 말도 정확하기만 했던 시어머니가 오전에 했던 일을 잊어버리고 했던 말을 계속 하는 걸 보고 있자니 큰며느리의 마음은 연약지반구역처럼 푹 꺼져버린다. 말수가  점 점 줄어들고 흐릿해지는 것 같아 결국 눈시울이 젖고 목이 메인다.

<4남2녀의 장남으로 죽으면 보상금으로 집안을 살리겠다는 각오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신 아버지>

큰아들, 점도에게 보내는 할머니의 마음 한 자락

(할머니의 회고)

 

큰아들, 점도야~
복도 없는 우리 아들
복 중에 어찌 일복을 타고 났다냐.

다시 돌아봐도 깜깜한 생애,
니가 외등처럼 내 삶을 비춰 주었구나.

점도 니가 아니었으면 피 토하고 죽었을
징그럽게 고생스럽던 삶이었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때
짊어진 짐이 너무도 무거워 벗어 던지고 싶을 때
그 마음 다잡은 것은 다 니 덕분이었다.

내 속에 들었다 나온 것 마냥
어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던 너였다.
시키지 않아도 뭐든 척 척 해냈지.

 

순하디 순한 얼굴에 언제 이리 주름이 많았졌냐.
일만 하다 늙어버린 누렁이의 눈처럼
슬픔이 가득하구나.

 

어쩌자고 도대체 어쩌자고
그리 일만 시켜먹었을까,
우리 점도가 내 아들이어서
나는 참말로 다행인데
우리 아들도 그럴까...


아니다.
다음 생애엔 일복 아닌 돈복을 타고 나
먹는 것도 배불리
공부도 넉넉히
잠도 퍼질러지게 자거라.
국말아 후루룩 한 사발 들이키는
고된 삶이 아니어라.

내게 와 주어
내 아들이어서
고맙고 또 고맙다.

<2017년 7월 23일 할머니의 모습>

오늘 할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즐겁게 해드릴게 딱히 없기에 자주 뵙는 것만이 그길입니다.

해가 넘어가고 내일 출근길이 있어 집을 나섭니다.
펴지지 않는 허리와 앙상한 팔로 무릎을 짚고 마중을 나섭니다.
벌써 가냐고!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하십니다.
맘은 천번 만번 곁에 자고 싶으나 오늘은 여의치 않아 길을 나섰습니다.
털썩 문앞에 주저 앉은 모습에서 소싯적 곱디 고운 할머니 모습이 비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서 떠남의 아픔을 온 몸으로 받아 안고 사시는 90평생의 삶이였기에 오늘의 귀가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종종 찾아 뵙는 것이 그 아픔의 치료제인줄 아오니 자주찾아 뵙겠다는 다짐으로 제 마음의 짐을 벗어 봅니다.

부는 바람을 탓을 하지 않고 자주 뵈러 가겠습니다. 할머니..사랑합니다.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쳐 주질 않고, 자식이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가 돌아가시어 효도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