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풍년을 몰고온다는 진전면 이명리 운풍들녘에
구름도 바람도
황금빛 들녘이 아름다워
잠시 머물고 가는 계절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뼈가 이룬 몸 하나로 버티며 만들어 오신 들녘이 황금빛 풍년으로 물들어가고 있지만!
아버지가 안계신 들녘은
모두 빈논처럼 느껴집니다.
"할아버지 중참드시고 하세요"란
손녀딸의 말에 뽑다만 피사리를 들고
성큼성큼 논속에서 걸어나오시는 모습이
이 처럼 그리움으로 남겨질지는 몰랐습니다.
아버지!
이 아들은
시인의 말씀처럼
가을! 운풍들녘의 황금빛 풍요로움이
두려워 나가 보지도 못하고
껴안지는 더욱 못하고 쓸쓸한
마음에
사부곡 한곡을 써보려고 합니다.
아버지!
보고싶습니다.
빈논
-안도현-
아버지
아버지의 논이 비었읍니다
저는 추운 書生이 되어 돌아와 요렇게 엎드려
빈 논, 두려워 나가 보지도 못하고
껴안지는 더욱 못하고 쓸쓸한
한 편 시를 씨 보려고 합니다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참나무 가시나무 마른 억새풀
아궁이 가득 지펴 펄펄 끓는 쇠죽솥
쇠죽솥같은 앞가슴
아직도 만들지 못하여서요
저 죽은논에 까무잡잡 살 없는 논에
물줄기도 비켜 가지 않게 불러들이고
그 흙물에 서늘히 발목을 적시고
눈 닿는 곳이 다 내 하늘이라
아버지 뼈가 이룬 몸 하나로 버티며 서 계셔도
아, 바로 아버지가 하늘이었지요
그때야말로 가난이 넉넉한 재산이었지요
오늘밤 아버지의 논에 누운 살얼음을 밟고
달이 둥실 뜨는 것을 아시는지요
달빛을 따라
이 궁핍한 밤에도 삽을 들고
성큼성큼 논으로 나가시는 아버지
옛날 이 땅에서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스스럼 없이 바지 활활 걷어붙이고
역사의 논물에 발을 담는 것도
거머리가 붙으면 이놈의 거머리 하며
철썩 젖은 종아리 아무 일 아닌 듯 때리는 것도
저는 겁나는 일이기만 한데
세상의 어둠 다 몰려와 난리를 치는
빈 논에 아버지 돌아오셨군요
아버지의 논바닥 저 깊은 곳에서
겨울에도 푸른 모들은 힘차게 꼼틀거린다고
제가 쓰는 시 이 부족한 은유로는
당신의 삶 끄트머리도 감당할 수 없음을 압니다
아버지
꿈에도 논에는 나오지 마라 하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