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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등불. 큰 아들 전점도

할머니의 등불. 큰 아들 전점도

할머니의 세월은
길었다. 험난했다.
하늘같이 소중히 여기던
아들 셋을 먼저 앞세우고 나서 잊음이 잦아 지졌다.

“우리 아들은 더런 엄마 만나서 고생 많았다.
자슥 때문에 안 살았나.
우리 큰 아들 없었으면 피를 토하고 죽었을낀데 아니면 도망가던지.
내 맘과 같이 어찌 저럴꼬. 참 좋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거치며 가난의 시대에 그 삶의 굴레는 그대로 큰 아들 점도에게로 이어졌다.
한 번도 거역 하지 않고 자기 뜻을 받쳐주는 큰아들에게 할머니은 작은 틈도 내어 줄 수 없었다.
아들이 곁에 없으면 할머니는 스스로가 무너질 것만 같았기에 그렇게 하셨다.
자신이 무너지면 가족이 무너질 것 같아 자신을 채근하듯 아들을 재촉했다.
큰아들과 자신은 꼭 하나처럼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데 삶을 송두리째 쏟아 부었다.
한량이셨던 할아버지, 그리하여 여자 혼자 몸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웠던 삶의 무게는 큰아들과 나누어 짊어지었다.
아무리 강해도 기댈 곳 하나 필요한 법, 할머니에게는 큰아들이 그런 존재였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을 그대로 빼닮은 부지런하고 듬직한 아들이었다.

천성이 부지런한 할머니와 짐을 나눠진 큰아들의 하루는 길었다.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할머니에게 하루를 남들처럼 사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새벽이면 날이 새기가 무섭게 큰아들을 깨워 일하기를 재촉했고, 아침밥 먹는 둥 마는 둥 사립문을 나서면 학교 가는 뒤통수에 대고 일찍이 오니라고 재촉했다.
일평생 낮잠이라고는 없었다. 제 몫의 일을 다 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지는 상황이라 늘 일에 체였다. 시험공부는 사치였다. 학교에 가면 전날 고된 농사일을 하느라고 꾸벅꾸벅 조는 것이 다반사였다. 농사일이 먼저고 학교는 뒷전이었지만 큰아들은 소원이 하나 있었다.
한 번 정도는 소풍을 가고 싶었다. 안 된다는 할머니에게 막내 시동생이 겨우 설득해서 큰아들은 소풍을 갈 수 있었다.
그동안 가보지 못한 소풍이었다.
기대에 들떠 갔지만 아이들과 함께 도란도란 둘러 앉아 도시락을 먹을 수는 없었다.
소풍은 간 날도 어김없이 죽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시락으로 주전자에 싸 간 죽이 부끄러워 몰래 산에 숨어서 먹었다.

“맨날 일 일. 시험기간에도 공부 못하고 일한다고 피곤해서 졸고.
하고 싶었는데 아예 나는 안 되고 내 밑에 동생이나 공부를 시키자.
그런 마음으로 살았어요. (큰아들 전점도)”

큰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한 몫 톡톡히 했는데 일곱 살 때부터 배 타고 가야하는 고성 동해면 외가에 혼자 심부름을 다녔다. 할머니가 부산 자갈치 시장에 팔러 갈 계란을 가지러 가는 심부름을 도맡아 했던것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시킬 일을 전부 큰아들에게 시켰다.
남편한테 쌓인 한을 자식들한테 풀어내는 듯 했다.
큰아들은 중학교를 졸업한 그 길로 농사에 발을 디뎠다. 농사일은 뭐든 처음이었다.
가르쳐주는 건 없었어도 못해서는 안 되었다.
열여섯, 처음 소로 밭을 갈 때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억지로 억지로 일을 했는데 일을 마치고 보니 고추 끝이 다 닳아 있었다. 분을 몇 통이나 바르면서 농사일을 했다.
젖에 염증이 생겨 고름 같은 젖을 먹이고 그 젖도 없어서 솥에 밥물 올라오는 거 받아 먹였다.
큰 아들의 살이 오를 리가 없었다. 잘 못 먹고 커서인지 자식들 중에 유독 왜소했지만 해 낸 일은 억척스러웠다. 장사로 바빠서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많이 안아주지도 못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맏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걸 희생하고 온 몸을 바쳐 식구들 건사하는데 자신의 삶을 다 써 버렸다.

“자슥 때문에 안 살았나.
아들을 낳아놓으니까 우찌 그리 일을 잘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자슥 때문에 살았다.
우리 큰 아들 없었으면 피를 토하고 죽었을낀데 아니면 도망가던지.
우리 큰아들 그 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좋지. 우찌 저리 착할꼬.
비할 데도 없고 버릴 거 하나 없이 좋지”

할머니는 그런 아들을 앞세웠다.
할머니의 등불이 꺼져버렸던 것이다.
독세 지옥처럼 힘든 생이었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자신의 뜻을 받들어주고 자신만큼 부지런하고 여문 큰아들 때문에 버티고 살았다. 아들이었지만 남편이자 동지였다.

그 감당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이후 할머니의 잊음은 잦아지셨다.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없었기에 그렇게 하셨다.


사진찍은날
1) 아버지 생신날, 2014년 3월 9일(일)
2) 아버지 생신날, 2015년 3월 6일(금)
3) 아버지가 일곱 살 때부터 타고 다닌 (고성동해면-진전면) 나룻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