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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해방과 한국전쟁

할머니의 해방과 한국전쟁

훤칠한 키에 당시 꽃다운 나이였던 할머니 또한 시대의 그림자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행여나 위안부로 끌려갈까 하는 초조함에 할머니는 결혼을했다.
오래전 그 날, 처음 선을 봤을 당시의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너무도 근사했다.
일본으로 데려가 그 놈의 팔자를 깨끗이 세탁해 줄 줄 알았다.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돈을 벌려 나가계셨다.
할머니를 천금처럼 여기던 시아버지도 1년 만에 세상을 등졌고 막내 시동생은 겨우 네 살이었다. 집도 불에 타 버렸다. 모든 희망이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작은 틈도 없이 자신을 옥죄는 노동 속에서도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돈을 많이 벌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남편은 벌어놓은 돈도 못 가지고 다시 해방된 조선으로 돌아왔다.
과부처럼 7년을 고생한 할머니는 남편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깊게 뿌리내렸다.
일제치하 36년 동안 혹사당한 우리의 재일동포들은 해방직후에도 어떠한 보상과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조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맥아더 태평양사령부지령 SCAPIN 제 44호에 따른 “재일 동포의 외환 및 재산의 반입을 제한” 조치에 따른 것이였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어쩔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빈손 귀국을 이해하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에게는 해방의 기쁨 잠시뿐이었다.
이내 곧 할머니의 동네엔 민족 간의 전쟁이라는 6.25 전쟁의 소용돌이 중심에 휘말리게 된다.
1950년 8월 2일에 시작되어 9월 14일까지 계속된 진전면 전투는 '각대미산"God Damn it!' 이라는 산 이름을 만들었다.

전쟁이 났을 당시 할머니 또한 피난길에 올랐다.
큰 아들은 세 살이었고 뱃속엔 둘째가 있었다. 간단히 짐을 싸서 친정인 고성 동해면으로 피난을 떠났다.
친정아버지가 죽을힘을 다해 파 놓은 굴이 있었다. 가족들은 모두 굴속에서 숨을 죽였다.
마산 진전면은 한국 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으로 아군과 인민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지만 가족들이 모두 무사했던 이유는 할머니의 피난 덕이였다.

사진 : 1) 마산 전투 당시의 UN군 및 북한군 배치도
2) 할아버지와 할머니
3) 할아버지 환갑잔치
4) 동해면 할머니 친정 방문 2020년 1월 24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