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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아리랑

장녀로 태어나 종부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삶의 고리는 그녀를 매순간 단단하게 옭아매는 그물이었다. 9남매의 장녀에서 6남매의 종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더 고된 짊을 껴안아야했다.
결혼하자마자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다시 떠났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시아버지조차 결혼 1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시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우찌 사나 싶어 눈앞이 캄캄했다.
4월에 세상 버리시고. 시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내가 그리 고생 안 했다.
시아버지는 점잖고 일도 잘 하고,
추모 비 세울 때 돌멩이를 지고 올만큼 힘이 장사였다.
돌아가시기 전에 배가 하도 먹고 싶다고 해서
어렵게 구해서 드렸다 아이가.
시아버지만 징겼으면 귀염 받고 좋다고 하고 살았을 낀데.
내 복이 작아서.”

할머니에게 시집은 죽 끓일 것도 하나 없고 집도 다 불 타버린 정말 불모의 땅이었다. 희망이라고는 없었다. 정말 하늘로 솟던지 땅으로 꺼지고만 싶었다.
하지만 식구들을 다 굶겨 죽일 수야 없는 일이었다.

굶주리지 않기 위해 산이고 들이고 바다고 벗은 발로 뛰쳐나가야 했다.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바다로 들로 산으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심정으로 헤매고 다녔다.
물때를 기다렸다가 갯일을 나가 바지락을 캐거나 홍합이나 굴을 구했다.
점심 한 때 식구들 먹이고 나면 한 숟가락 정도 되는 묽은 죽을 겨우 한 숟가락 털어 넣고 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물을 캐고 봄이면 들로 나가 쑥을 캤다. 근근이 연명하던 삶이었다.

땅도 없는 처지에 쌀밥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삼베 짜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할머니는 삼베를 짜 주고받는 품삯으로 근근이 버텼다. 솜씨가 좋고 손이 빨라서 삼베 짜 주러 이 곳 저 곳으로 불려 다녔다.
품삯이 많지는 않았지만 품을 팔러 갈 때엔 밥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멀건 죽이라도 제대로 먹은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삼베 일을 하러 가기 전날엔 배불리 먹을 생각에 선잠을 잤다.

할머니는 여물지 못한 남편과 5남매의 시집 식구들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
홀로 가장이 되어 생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했다.
일부자로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시절 할머니가 살아내야 했던 삶은 그녀에게는 독세 지옥이었을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를 가난과의 전쟁으로 채워진 삶이었다.
불덩이 같던 속을 식히려면 원망이 드는 마음을 노동으로 쏟아내는 길 밖에 없었다.
원망한들 하소연한들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삶이니 군말 없이 해야 될 몫을 몇 갑절 해내는 것으로 살아 내셨을 것이다.

그 덕에 우리는 굶지 않게 되었다.

사진찍은 날 :
2014년 6월 06일(금) (집앞 대문앞에서)
2014년 7월 23일(수) (소파에서 같이 찍은 사진)
2015년 4월 12일(일) ( 운풍들 큰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