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할머니 가슴에 박힌 두 개의 못

할머니 가슴에 박힌 두 개의 못

 늘 가지런히 놓여있던 할머니의 신발..

무언가 조금 다르다.

요즘 할머니처럼 무언가 다르다.

 

어제 다녀갔었는데.

오랫만이다. 왜 이렇게 뜸 했느냐? 하신다.

 아이처럼

내곁에 붙어 계신다.

 

글을 모르셨어도...

총기 하나로..

기억력 하나로...

 작지 않은 집안의 큰어머니로..

세분의 시동생과 두분의 시누를

육남매를....

그리고 나를...

또 그리고 나의 아이들을..

사랑해 오며 사셨는데..

 

조금 피곤하셨나 보다.

 늘 정갈했던 신발이..

오늘은 어긋나 있다..

 

어긋난 신발이 맘에 걸려..

내맘도 조금 어긋났나 보다.. 맘이 아려오는 것을 보니...

 

늘 한 그루 큰 나무처럼 한자리 한곳에 계셨던 할머니..

이제 그 곁에 바람이 불 듯 하다.


 아~~! 할머니

<이런적이 없었는데 할머니 신발이 어긋나 있었다. 내맘도 조금 어긋났다. 맘이 아픈걸 보니>

 

 할머니의 가슴에는 눅눅한 한숨들이 먼지처럼 쌓여 곰팡이가 피었다. 곰팡이들은 펄 펄 날지도 않고 가슴에 척 달라붙어 머릿속까지 휘젓고 다닌다. 떼어낼 수도 떼어내어 지지도 않는 잔인한 사실. 금쪽같은 아들 둘을 먼저 보낸 할머니의 가슴은 잿빛이 되어 무지개를 보아도 춤을 출 수가 없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아들을 부를 때 간절해지고 아린 마음이 든다. 하물며 가슴에 묻은 아들은 말해 무엇하랴.

 

구십 평생을 살면서 할머니의 가슴에 가장 큰 한은 두 아들을 앞서 보낸 것이다. 가슴에 커다란 못이 두 개 박혔다. 아무리 빼내려고 해도 빼낼 수 없는, 아니 빼내고 싶지 않은 못이다. 상처가 덧날까 겁이 나서가 아니라 그 못 마저도 아련하게 그립기 때문이다. 부산까지 뱃길을 오가며 물건을 팔러 다닐 때 늘 업고 다녔던 둘째 아들과 모든 열과 성을 다해 대학까지 공부 시킨 집안의 대들보 셋째 아들이 할머니에게 빼내려고 해도 빼낼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뼈아픈 못이다.

 

우짠다고 내가 아들을 앞세우고 이리 살고 있노.

 

 둘째 아들은 간암이 악화되어 세상을 등졌다. 간단한 수술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개복해 보니 이미 여러 장기에 전이가 되어 있었다. 손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다시 배를 닫았다. 그게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한국전쟁 당시 뱃속에 있었던 둘째는 태어나기도 전에 전쟁의 공포가 전해져서인지 유독 고집이 세고 힘에 부치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백일 전부터 부산 자갈치 시장에 장사하러 다닐 때 짐보따리 처럼 업고 다녔다. 밤 객선을 타고 가 그 한 대서 잠을 잤던 둘째, 변변한 기저귀가 없어 축축한 기저귀를 차고 있기도 했었다.

잊지 못할 추억도 많다. 자갈치 시장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넘기고 국제시장에 가서 물건을 해 오는데 등이 묵직하여 돌아보니 검정고무줄을 한 가득 쥐고 있는 게 아닌가. 객선에 오르려던 참이라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왔다. 여름 밤, 장사를 마치고 창포고개를 넘어올 때는 등에서 따신 김을 새근새근 내뱉던 둘째 아들이었다. 길동무도 되어 주고 비록 혼잣말이었지만 말동무도 되어 주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창포고개지만 그 곳 서늘한 창포고개가 아들에 대한 묵묵한 그리움으로 밀려올 때가 있다. 풀냄새, 벌레 소리, 여우 우는 소리, 그리고 둘째 아들의 숨소리가 어우러진 그 여름 밤길의 추억에 마음이 서걱거릴 때가 있다.

 

 3년 전에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고 어릴 때부터 야무지고 영특한 짓만 했던 셋째 아들도 생을 마감했다. 몸의 이상을 발견한 후엔 이미 췌장암 말기였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머지 삶을 정리하는 것, 조금의 시간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셋째 아들은 집안의 모든 힘을 동원해 공부 시킨 아들이었다. 촌에서 대구 영남대까지 보냈다. 할머니는 사는 게 바빠도 뒷바라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똑똑하고 인물도 좋고 정리정돈도 알아서 잘해서 입 댈 게 없는 아들이었다. 두루두루 성격도 좋고 수완도 남달랐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너무 치우치는 집에 장가를 가서 꼭 아들을 뺏긴 것 같았다. 명절날도 쫓기듯 자리를 떴고 차근히 마주 앉아 볼 시간이 없었다. 이혼까지 했다. 한이 많이 남는 아들이었다. 그 아까운 아들이 췌장암 판정을 받고 석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악 소리도 손도 써 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보내버렸다.

 

 가족들은 아들의 죽음을 할머니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큰아들 내외는 초상을 다 치르고 나서야 겨우 입을 뗐다

 셋째 아들의 죽음까지 전할 때에는 듣는 이만큼이나 말하는 쪽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 즈음 총총하던 기억들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아들의 제삿날을 시부모님 제사로 착각하기도 했다. 자식들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들 제사인 줄도 모르고

할배, 할매들은 좋겠다. 제사 때 이렇게 제관들이 많이 오고 그리하지.

기억이 없는 게 그럴 땐 좋더라. (큰며느리 김말란)

 

<할머니는 살기 위해 기억을 지운듯 했다. 그래서 웃으시는 날도 많다>

 할머니는 살기 위해 기억을 지운듯 했다. 아무리 강한 할머니도 감당하기 힘든 상처, 받아들일 수 없는 아픔이 있는 것이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아들을 먼저 보낸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독한 할머니도 어려운 일이었다. 찢어진 심장을 덮어만 놓고 차마 들쳐보지 못했다. 대쪽 같고 흐트러짐 없고 기억도 말도 정확하기만 했던 시어머니가 오전에 했던 일을 잊어버리고 했던 말을 계속 하는 걸 보고 있자니 큰며느리의 마음은 연약지반구역처럼 푹 꺼져버린다. 말수가  점 점 줄어들고 흐릿해지는 것 같아 결국 눈시울이 젖고 목이 메인다.

 

말이 점 점 없어지잖아. 기억도 총총했는데 자꾸 까묵고.

또 묻고 또 묻고. (큰며느리 김말란)

할머니의 마음 안에는 먼저 떠난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이 언제나 가득 자리 잡고 있다. 가만히 불러만 보아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렇게 아플 수가 없다. 한 번씩 기억이 돌아오는 날이면 그득 차 있던 슬픔이 쏟아진다. 젖어진 눈에는 아직도 젊은 아들의 모습이 선하다. 자식을 귀하게 여기던 할머니이었다. 무서운 할머니이었지만 무섭게 굴지는 않았다. 자식들한테 엉덩이 한 대도 손대본 적이 없는 할머니이었다. 너무도 귀하고 아까운 아들을 어찌 때릴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80살 이상 차이 나는 왕할머니와 내 딸은 잘 노신다.  자식을 귀하게 여긴  할머니 이시기에 >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절통한 심정을 할머니는 혼자 있을 때 시를 읊듯 되뇌인다. 한 번씩 비가 내린 듯 정신이 말끔해지는 날이면 할머니는 먼저 죽은 아들들이 떠오른다. 아들을 부르는 말인지 한을 쓸어내리는 말인지 우리 아들들은 왜 죽었을꼬.”를 몇 번이나 되씹는다. 그리고 꼭 눈물바람이 일고 사는 게 너무나 억척스럽고 서럽다. 이런 날은 목에 가시도 아닌 것이 걸려 밥을 잘 넘길 수가 없다. 매일이 이러하다면 지켜보는 가족들도 얼마나 슬펐을까.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면 거리를 헤매고 다녔을 것이다.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과 늘 함께 지냈을 것이다. 슬픔이 멈추는 시간은 아마도 할머니가 아들들을 만나게 되는 그 때가 아닐까.

 

 <이렇게 일하시면서도 아들을 부르는 말인지 한을 쓸어내리는 말인지 우리 아들들은 왜 죽었을꼬.”를 몇 번이나 되씹는다>

못다 한 사랑이 미안해서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팔자가 너무도 짠해서 가슴에 박힌 못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가 있다. 자식이 전부였지만 자식이 먼저이지 못할 때가 많았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살아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부모가 자식한테 하는 말인 줄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