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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 그곳에서 만난 나의 아버지, 그리고 나의 할머니

얼마전 영화 국제시장을 보았다.

보는 내내  

내 아버지의 삶과 할머니의 삶을 본듯 하여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많은 관객이 들어찬 극장 이었지만....

꺼이 꺼이 소리 내어 울 수 밖에 없었다. 


1922년생 이신 할머니, 1948년생 이신 아버지의 삶을 1977년인 아들이 되짚어 본다.

이 순간에도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아버지, 아버지는 약속 잘 지켰습니다. 
네! 정말 잘 살신거 맞습니다.. 
진짜로 힘든 시절 잘 견뎌내셨습니다"

4남2녀의 장남!
머리가 좋으셔서 곧잘 공부도 잘 하셨지만 중학문턱을 넘자 마자 집안의 삶의 가장 노릇을 하셔야 하신 울 아버지!
내 하나로 부모 동생들은 배불리 먹고 공부 할 수있을 거라 여기시고 떠나신 월남전쟁!
동생들 시집 장가 보내고 나서 문득 뒤돌아 보니 곁에 아들과 딸이 보이더라 하신말씀!

아끼고 아끼고 아낄것이 없어 무논에서 일할 때 신는 장화 밑창이 두번 헤질때 까지 신으셨다는 말씀!

"네!!! 아버지, 아버지는 약속 잘 지켰습니다. 
네!!!! 정말 잘 살신거 맞습니다. 
정말 진짜로 힘든 시절 잘 견뎌내셨습니다"

사랑합니더!
고맙습니더!
감사합니더!(진짜로 힘든 시절 잘 견뎌내신 아버지께 아들이 드리는 글)


천성이 부지런한 할머니를 꼭 빼닮은 큰아들인 나의 아버지의 하루가 길었다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할머니에게 하루를 남들처럼 사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새벽이면 날이 새기가 무섭게 아버지를  깨워 일하기를 재촉했고, 아침밥 먹는 둥 마는 둥 사립문을 나서면 학교 가는 뒤통수에 대고 일찍이 오니라고 재촉했다. 일평생 낮잠이라고는 없었다. 제 몫의 일을 다 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지는 상황이라 늘 일에 체였다. 시험공부는 사치였다. 학교에 가면 전날 고된 농사일을 하느라고 꾸벅꾸벅 조는 것이 다반사였다. 농사일이 먼저고 학교는 뒷전이었지만 큰아들은 소원이 하나 있었다. 한 번 정도는 소풍을 가고 싶었다. 안 된다는 할머니에게  막내 시동생이 겨우 설득해서 아버지는 소풍을 갈 수 있었다. 그동안 가보지 못한 소풍이었다. 기대에 들떠 갔지만 아이들과 함께 도란도란 둘러 앉아 도시락을 먹을 수는 없었다. 소풍은 간 날도 어김없이 죽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시락으로 싸 간 죽이 부끄러워 몰래 산에 숨어서 먹었다.

 

 

맨날 일 일. 

시험기간에도 공부 못하고 일한다고 피곤해서 졸고.

정말 공부 하고 싶었는데 

아예 나는 안 되고 내 밑에 동생이나 공부를 시키자.

그런 마음으로 살았어요. (어버지 회고)

 

 

 <배우고 싶으도 못배운 한 때문에 속으로 우셨을 우리 아버지 아들의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사진을 보면 속으로 우신 표가난다. >


농사일로 치이는 일상에서도 큰아들인 아버지는 공부를 꽤나 했다. 하지만 차마 학교를 더 다니고 싶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최종학력은 중학교 졸업이다. 할머니에게는 자식 6남매에 막내 시동생까지 자식이 일곱이었다. 할머니가 시집올  당시 막내 시동생은 3살이었다.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여섯에 어머니마저 잃은 막내 시동생은 할머니에게는 아들과 다름없었다.

 사는 게 너무도 팍팍하여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한 미안함은 쉬이 지워지지 않아 큰아들도 덩달아 공부를 시킬 수 없었다. 농사일에 바빠도 곧잘 공부를 했던 아들에게 모질게 말했다. “너거 삼촌도 공부를 못 했으니까 니도 못하는 건 줄 알아라.” 아들에게 한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한 다짐 같았다. 그래도 아들은 아들이지, 그 때랑 시대가 변했는데 라는 말로 적당히 모른 척 하고 싶은 마음을 단박에 잘라낸 것이다.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고 자식 일 시켜 묵을라고 안 했나.

옛날 생각할라 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우리 아들은 더런 엄마 만나서 고생 많았다.

내 맘과 같이 어찌 저럴꼬 참 좋아.

자식한테 일복을 줬어자식들이 욕 보요자식한테 일복을 많이 줘서 참 미안소.

내만 하고 말았으면 좋았을 건데(할머니의 회고)


큰아들이 베트남으로 떠난 날, 하늘이 무너지던 날

 

베트남 보내놓고 내가 미쳤지. 내가 울기도 많이 울고.

그 때 마음은 말도 못해. 지금도 생생히 목이 메인다. 

(할머니의 회고)

 

베트남 전쟁이 끝으로 치닫던 1972, 아버지는 입이라도 하나 줄여볼까 하는 마음으로 베트남을 선택하게 된다. 아니, 죽을 각오로 떠나는 길이었다. 혹시 잘못되면 보상금으로 동생들 공부라도 편하게 시킬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떠났다. 각오는 대단했지만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스물넷, 결혼을 해서 알콩달콩 신혼을 즐기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42녀중 큰아들에게는 제 삶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본인은 완전히 던져 놓고 살아 온 인생이었다. 죽을 각오로 떠나는 길이였다. 그 때 나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은 나이이기도 하다.

 

보내줍니까, 안 보내주지. 나 하나 희생하면 식구들이 잘 살 수 있고.

연금 나오면 동생들 공부도 시킬 수 있고. (42녀의 장남 이었던 나의 아버지의 심정)

 

당시 동네에서는 베트남에 갔다가 보상금을 한 몫 챙겨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리 한 쪽과 맞바꾼 보상금을 안고 돌아오는 이도 있었고 멀쩡하게 살아왔는데 전투부대에 있었던 터라 큰돈을 손에 쥐고 돌아오는 이도 있었다. 결국 돈 욕심에 눈이 멀어 한 번 더 떠났다가 주검이 되어 돌아오기는 했지만 보상금만은 남았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어버지는 베트남으로 떠나기로 굳게 마음을 먹게 된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 놓는 희생하는 마음이 아버지는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허락을 해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아버지는 가족에게는 비밀로 하고 홀로 베트남을 떠날 계획이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무렵의 아버지 모습 앞쪽 왼쪽에 계신분이 나의 아버지>

 


베트남으로 떠나기 3일전 겨우 그 소식을 알게 된 할머니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부산 부두를 찾았다. 할머니는 당시 부산 수협에서 근무했던 남동생의 도움으로 프랜카드에 아들 이름을 크게 써서 들고 다니며 소리쳐 불렀다. 저 멀리 아들인가 아닌가 목이 터져라 불렀다. 아들과 함께 한 세월을 모두 털어 이렇게 애타게 부른 적이 있을까. 겨우 목소리가 닿아 배에 탄 아들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큰아들의 눈물 어린 얼굴을 보고서 할머니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동안 꾹 꾹 눌러온 한 많은 세월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목이 멨다.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떨구는 눈물 뒤로 하고 싶은 말들을 꾹 꾹 삼켰다.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을 꺼내면 겨우 눌렀던 두려움이 일시에 악하고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마음을 겨우 달래고 작별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생이별 앞에 가슴이 찢어졌다. 할머니는 결혼 직후 일본으로 남편이 떠날 때에도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지 않았다. 새삼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선명해졌다.

 

선창가 다니면서 찾는다고. 안 보이는데 막 부르고 다녔지.

큰 배에 올라가 있는 큰아들을 보고선 어찌나 반가운지. 지금도 눈물도 난다.

그 큰 배에서 엄마하고 부르는 기라. 참 기뻐서. 어디다 말을 다 하노. (할머니의 회고)

 

<할머니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들을 불렀을 월남 파병선: 사진출처: http://blog.ohmynews.com/gompd>

그렇게 아들을 보내고 돌아온 날 밤, 아들이 잘못될까 하는 불안감으로 온 몸은 불덩이였다. 물을 몇 바가지 뒤집어써도 뜨거워진 몸은 식지 않았다. 다리도 풀리고 눈도 풀려 버렸다. 정신도 나가버렸다. 흉악한 꿈이라도 꾸는 날이면 그 날은 하루 종일 두려움에 몸이 벌 벌 떨렸다.

 

아들 하나 보고 버텨온 삶이었다. 처음으로 겪는 두려움은 그녀를 신에게 다가가게 했다. 한 번도 의지하지 않았던 신을 찾았다. 아들의 무사귀환은 그동안 지켜왔던 성실과 꿋꿋함으로는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쯤 미친 상태에서 근근이 삶을 살아냈다. 그동안 지켜왔던 삶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만큼 절망에 몸부림쳤다.

 

베트남 보내놓고 내가 미쳤지. 내가 울기도 많이 울고.

그 때 마음은 말도 못해. 지금도 생생히 목이 메인다. (할머니의 회고)

 

 

추석 즈음에 떠난 아들, 어느덧 9월이 가고 10월도 며칠이 지나 있었다. 곧 겨울이 닥쳐올 것인데 어찌 지낼 것인지 걱정부터 앞선다. 베트남의 날씨가 어떠한지를 따져볼 생각이 끼어들 틈 없이 큰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휩싸여 있었다. 큰아들과 생이별을 하고 할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지냈다.

절을 몰랐던 제연은 큰아들이 베트남으로 간 직후부터 열심히 절을 다니기 시작했다. 집 뒷산 용문사 절을 하루도 빠짐없이 오가며 빌고 또 빌었다. 온 정성을 다해 손이 닳도록 빌었다. 강인하게 살아온 남자같이 뚝심이 있던 할머니였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땅을 딛고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하루 온종일 할머니의 입에서는 큰아들의 이름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점도야~~~!

점도야~~~!

 

 

할머니는 집뒷산에 있는 용문사 절을 다니며 그나마 미치지 않고 큰아들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후 이십 몇년이 흐르고, 사는 데 여유가 좀 생긴 후 할머니는 용문사 가는 길을 닦았다.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용문사 절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시절 할머니가 절을 오가며 얼마나 위안을 받았는지 생을 지탱할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독세 지옥처럼 힘든 생이었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자신의 뜻을 받들어주고 자신만큼 부지런하고 여문 큰아들 때문에 버티고 살았다. 아들이었지만 남편이자 동지였을 터이다. 그런 아들과 함께 다솔 식구를 책임지다가 할머니 혼자서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해낼 생각을 할 때면 곧 들이닥칠 겨울보다 더 삶이 매섭게 다가왔다. 큰아들 걱정에 딱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을 때 예고 없이 큰아들이 돌아왔다. 그 때 생각만 하면 눈시울보다 몸이 먼저 젖어든다. 그 때 마음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어서 세월이 그토록 흘렀어도 생생히 목이 메여오는 것이다.

 

마침 얼른 오는 기라. 어째서 그리 얼른 온 지 몰라. 좋아서 죽지 뭐.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아들에 대한 할머니의 회고)

 

 

아버지는 베트남으로 떠난 지 6개월 만에 귀환했다. 전쟁이 끝이 난 것이다. 큰아들은 다친 곳 없이 생각보다 이르게 다시 할머니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보상금은 없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때 돈보다 더 중한 것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1972,, 입이라도 하나 줄여볼까 하는 마음으로 베트남을 선택했지.

 아니, 죽을 각오로 떠닜었다.

 혹시 내가 잘못되도 보상금으로 동생들 공부라도 편하게 시킬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떠났다

 죽었으면 포상이 있었을낀데 살아와서 포상도 없었지.

 나 하나는 진짜로 완전히 던져 놓고 살았어.

 다칠까 걱정되는 마음 있으면 안 갔지. 죽을 마음을 먹고 갔지. (아버지의 회고)

 

 

큰아들점도에게 보내는 할머니의 마음 한 자락

(할머니의 회고)

 

큰아들, 점도야~

복도 없는 우리 아들

복 중에 어찌 일복을 타고 났다냐.

 

다시 돌아봐도 깜깜한 생애,

니가 외등처럼 내 삶을 비춰 주었구나.

 

점도 니가 아니었으면 피 토하고 죽었을

징그럽게 고생스럽던 삶이었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때

짊어진 짐이 너무도 무거워 벗어 던지고 싶을 때

그 마음 다잡은 것은 다 니 덕분이었다.

내 속에 들었다 나온 것 마냥

어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던 너였다.

시키지 않아도 뭐든 척 척 해냈지.

 

순하디 순한 얼굴에 언제 이리 주름이 많았졌냐.

일만 하다 늙어버린 누렁이의 눈처럼

슬픔이 가득하구나.

 

어쩌자고 도대체 어쩌자고

그리 일만 시켜먹었을까,

우리 점도가 내 아들이어서

나는 참말로 다행인데

우리 아들도 그럴까...

 

아니다.

다음 생애엔 일복 아닌 돈복을 타고 나

먹는 것도 배불리

공부도 넉넉히

잠도 퍼질러지게 자거라.

국말아 후루룩 한 사발 들이키는

고된 삶이 아니어라.

 

내게 와 주어

내 아들이어서

고맙고 또 고맙다.





<2014년 할머니 생신 맞이 가족 사진>

 

 

<모진 세월 보내시고 2014년  아내와 아들, 며느리, 딸, 손자 손녀와  일본 가족 여행에서>


이 글을 정리하는  이순간....

할머니의 손자 이자 

아버지의 아들인 

나의 눈은 뻘겋게 달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