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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의 문학적 업적과 더불어 그의 삶의 행적 또한 신중하게 보아야 하겠다.

노산 이은상은 친일잡지『조광(朝光)』의 주간으로 재직했고,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에도 재직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955년 이승만 80회 생일 때 '송가(頌歌)'라는 제목의 경축시를 발표했다.
이은상은 해방 후에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앞장서 문인 유세단을 조직해 전국 순회유세를 벌이기도 하였다.
노산은 1960년 3월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전국유세단의 일원으로 “이승만 박사의 위대함과 이기붕 의장의 성실하고 자애로운 인간성”을 설명하였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상고 입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라 2차 마산의거가 진행되던 시점에 “3․15사태는 불합리와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이며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라고 하였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주었다고 한다.
1972년 10월 '청우회' 중앙본부 회장으로 있으면서 '유신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1975년 5월 13일,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 악법이라 하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고 며칠 뒤 '총력안보 서울시협의회'가 창립되었을 때 회장을 맡았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경하하며」,「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여론」을 발표하였다. 이후 국정자문위원으로 들어갔다.

문학적 업적과 더불어 이러한 업적이 많은 노산 이은상의 흔적은 창원시 마산지역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자산동 약수터 옆 ‘노산공원’에는 가곡 <가고파 기념비>가 서 있다.<가고파 기념비>는 이외에도 산호공원과 돝섬에도 세워져 있다.
이은상이 태어난 곳은 노산동이라 하고,길은 노산로(路)로 명명되었다.우리지역의 대표 축제의 이름도 ‘가고파 국화축제’이다.
구)마산여객선터미널 안에 있는 화단에이은상의 시조 "가고파"를 새겨놓은 시비가 있다.
마산합포구 산호동 소재 용마산 '시의 거리'에는 이은상의 시조 "가고파"가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마산회원구 봉암동 소재 창신고등학교 체육관 앞에는 이은상이 시조 "가고파" 10수를 모두 새긴 비가 있다. 
마산역 광장에도 '가고파 노산 이은상 시비'가 있다. 
마산합포구 노산동에 있는 마산문학관 뜰에도 노산시비가 있다. 이곳에는 이은상이 지은 시조 "옛 동산에 올라"가 새겨져 있다.
마산합포구 노산동에는 '은상이샘'이 '3·15의거기념비'와 나란히 있다. 
'가고파 꼬부랑길 벽화마을'도 있다. 
'노산동 가고파거리'가 있다. 
노산의 문학적 업적에 걸맞게 많이 있다.


(<고지가바로저긴데>, 1953년)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노산의 문학적 업적과 더불어 그의 삶의 행적 또한 신중하게 보아야 하겠다.
나로선 우리지역의 자랑스런 인물인데 예서 말 수는 없다.